도전!!! 1000권 읽기

61-65권 [ 해시의 신루 1. 2. 3. 4. 5]

가네샤7 2022. 10. 28. 21:40

61-65권 [ 해시의 신루 1. 2. 3. 4. 5]

윤이수. 해냄.  2016.

* 책을 읽으며 내 맘에 파장을 일으켰던 말들과 느낌들을 주로 적어본다~~

[구르미 그린 달빛] 으로 널리 알려진 저자는 역사적 사실을 뼈대로 삼아 기발한 발상과 섬세한 묘사, 운율감 넘치는 문체를 구현해 아름답고 감성적인 사랑 이야기를 탄생시켰다. 이 책에서 저자는 밤의 신기루처럼 보이지 않는 실체를 좇는 조선 과학자들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고 한다. 조선 최고의 군주였던 세종대왕의 장자이자 단종의 아버지인 문종. 그는 위대한 아버지와 불운한 아들에게 가려져 있지만, 조선을 지킨 그 누구보다도 강인한 군주였고, 선견지명을 지닌 열정적인 과학자의 삶을 살았다. 세자 향과 미래를 보는 여인 해루가 펼쳐내는 깊은 밤 신기루 같은 사랑이야기는 찬란했지만 너무 짧아 서러웠던 그래서 유난히 아름다웠던 그의 이야기가 재탄생된 것이다.

.

.

< 1권 : 북극성을 찾아서 >

- "앞으로 제 종자 노릇을 할 아이입니다." 향의 입에서 느닷없는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 해루의 눈앞으로 바싹 다가온 향은 손에 쥐고 있던 종이를 활짝 펼쳤다. 해루의 손바닥이 선명하게 찍힌 종이.
그 종이 위에 반듯한 모양으로 딱 세 글자가 쓰여 있었다. 
我取你
해루의 고개가 갸우뚱 기울어졌다. "내가 너를 취한다?"
"이제부터 너는 나의 것이란 뜻이지."  향의 낮은 속삭임에 해루의 안색이 해쓱해졌다.
'망했다.'

- 해루는 공갈 선비(향)에게 문서를 돌려주었던 제 손을 몇 번이고 쥐어박았다.  미쳤지, 미쳤어.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는 데만 급급해서 이후의 일은 생각하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 되었다... 불퉁한 얼굴로 투덜대는 해루를 보며 황 노인(영의정)이 처량한 얼굴로 말했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지 마라." 
"무슨 소리입니까?"
"나는 저이 아버지께 붙들려 무려 반백 년을 그리 살았다."
먼 허공을 바라보는 황 노인의 눈가에 지나온 세월에 대한 회한과 정체 모를 억울함이 가득했다. 
"어쩌다 그리되셨습니까?"
"번지르르한 말치레에 넘어간 거지, 뭐."
해루는 물끄러미 황노인을 바라보았다. 저와 나란히 앉아 있는 노인의 모습이 묘하게 닮아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동병상련.
"알고보니 할아버지 신세가 미천한 저와 별반 다를 것이 없네요."
"내 말이 그 말이다."
"이제는 쉬실 때도 되셨네요."
"이미 때를 넘겨도 한참 넘겼지."
"그럼 쉬신다고 하십시오."
"말을 한다고 들어주실 분이 아니시다."
"노인 학대입니다. 무릇 선비란 웃어른을 공경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내 말이 그 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문서 한장으로 공갈 협박하는 비정한 분과는 다르시겠지요?"
"문서로 사람 잡는 건 그 집안 내력이다."
"밤잠 없는 것도 닮았습니까?"
"두말하면 잔소리지."
"힘들다 하소연해도 눈길 한번 안 주시는 것도요?"
"말하는 내 입만 아프다."
"제 평생에 한양 갈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라도, 만에 하나, 천에 하나, 한양 땅을 밟게 된다면 그 집안은 필시 피해 다녀야겠습니다."
" 내 말이 그 말이다."

- 하얀 별꽃이 가득 피어 있는 밤하늘.
밤이 그려낸 신기루이려나? 천상의 세상에 발을 디딘 듯 아련한 아름다움에 해루는 멍해졌다. 여기까지 오느라 쌓인 피로와 마음 속의 불만이 일시에 봄눈처럼 사라졌다. 이리 아름다운 밤하늘이라니. 
밤하늘에 피어난 하얀 별꽃 더미로 풍덩 뛰어들고 싶었다. 그동안 사는 데 바빠 하늘을 올려 볼 사이도 없었다. 언제나 같은 자리에 있는 하늘이고, 언제든 볼 수 있던 하늘이었다. 그런데 그 하늘에 저리도 아름다운 꽃밭이 펼쳐져 있었다니. 처음 만나는 하늘 세계에 단박에 마음을 빼앗겼다. 마치 나비잠에 빠진 갓난아이처럼 해루의 입가에 해사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 세상에서 가장 치열하며 가장 아름다운 곳이기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분명한 이유와 타당한 명분이 존재했다. 감히 우러러 볼 수도 없는 왕실의 사람들은 물론이고 조정 대신들, 수천의 병사들, 그리고 궁녀와 환관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존재 이유가 명확했다...
하지만 한 곳. 해루가 있는 이곳, 신루라는 작은 전각에 있는 사람들만은 예외였다. 집현전 산하 기관 중 한 곳인 신루. 동궁전의 구석진 한편. 으슥한 그늘 구석에 눈을 비비고 찾아야 겨우 현판을 찾을 수 있는 허름한 전각. 완벽한 조화를 이룬 궁에서 유일하게 무질서한 모습을 보이는 건물. 이상한 것은 비단 전각뿐만이 아니었다. 신루에 있는 사람들 역시도 질서 정연한 궁과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 

- "우리는 연구하는 사람들이다. 고민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만드는 사람들이다."
"만드는 사람들.......?"
"비록 지금은 허황하여 쓸모없어 보일지 몰라도, 불가능한 꿈과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열심히 발버둥 치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바뀔 수 없는 미래란 존재하지 않는다. 불가능은 그저 지금까지 할 수 없었다는 말에 불과하지."
...... 신루의 학자들. 세상 사람들에게 세상 물정에 어두운 선비라 불리며 하는 일 없이 무위도식한다며 손가락질 받던 그들은 사실 불가능에 도전하는 사람들이었다. 
...... 해루는 향과 시선을 마주했다. 저도 할 수 있을까요? 제가 바꿀 수 있을까요?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도망치는 것밖에 몰랐던 제가...... 지금도 여전히 도망치고 싶은 마음뿐인 제가...... 저하와 저분들처럼 과연 할 수 있을까요? 꺾이고 쓰러지는 것을 두려워 않고 도전하고 또 노력할 수 있을까요?

 

< 2권 : 화마가 가른 운명 > 

- "사람이라는 게 높으나 낮으나 다르지 않더구나."
"무슨 말씀이세요?"
"듣기 좋은 말엔 웃고, 듣기 싫은 말엔 찡그리고, 자존심이 상하면 화내고, 제 것을 잃으면 슬퍼하고, 조언하면 욕하고, 박수치면 즐거워하고, 적당히 교만하며 비위를 맞춰주면 알아서들 따라오더구나."
"높은 사람들도 지금까지 만난 사람들과 크게 다를 바 없단 말입니까?"
"오히려 욕심이 많아서 다루기가 더 편해. 이번 일로 내 확실히 알게 되었다. 사람 사는 게 매양 다르지 않다는 걸 말이다. 높은 양반들이나, 미천한 노비나. 그래서 그들 듣기 좋은 말 몇 소절 읊어댔지. 그랬더니 무척 즐거워하며 덩달아 날 치켜세우지 않겠느냐? 난 내 입으로 내가 어떤 사람이다, 이렇게 말한 적이 없어요. 적당히 화두를 던지면 알아서들 오해한 거지. 그러니 사기 친게 아니야. 그저 대세의 흐름에 몸을 맡겼더니, 원치 않게 대단한 사람이 되어버린 거지."
이 모든 상황이 제 탓이 아니라는 듯 대답하는 정 판수를 보며 해루는 긴 한숨을 쉬었다. 

- 궁궐이라는 황금의 고치. 하지만 화려한 고치 안에선 그 무엇도 자유롭지 않았다. 
왕족이기에, 왕세자이기에 그 무엇 하나,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왕족이기에 모든 행동에는 명분이 필요했다. 왕세자이기에 숨소리 하나마저도 법도를 지켜야 했다. 차마 잠꼬대조차 함부로 할 수 없는 곳.
궁이란, 적과 아군을 구분할 수 없는 그런 곳이었다. 사방이 가로막힌 궁 안에서 향은 마음을 베어버렸다.
지키지 못할 바엔 지키고 싶은 그 무엇도 더는 만들지 않으리라. 그 누구도 믿지 않으리라. 그 누구도 마음에 담지 않으리라.  그 누구에게도 진심을 말하지 않으리라. 
그런데...... 이 아이가 자꾸만 심장을 파고들었다. 하 많은 여인 중에 해루가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 생각해보면 작정하고 세자빈 간택에 참여한 세작이 눈에 띄는 행동을 할 리 만무했다. 지금의 노력이 헛된 것일 수도 있으리라. 그렇다고 해도 어쩔 수가 없었다. 쓸데없는 노력이 될지 모르지만, 해루는 포기하지 않았다. 
"발버둥 치는 사람에게 바꿀 수 없는 미래란 존재하지 않는다."
해루는 언젠가 향이 해 주었던 이야기를 주문처럼 되뇌었다. 힘들 때마다 이 말을 되새기면 힘이 솟곤 했다.
"열심히 하자. 죽을 만큼 발버둥 치는 거야. 그러면 반드시 좋은 일이 생길 거야." 
해루는 허물어지는 의지를 다잡듯 주먹을 불끈 쥐었다.

- "무엇이 그리 부러우냐? 아비가 대제학이라는 것이 부러운 것이냐? 아니면 고운 미색이 부러운 건가?"
"아비가 있음이 부럽습니다. 저리 곱게 자랄 수 있도록 누군가 곁을 지켜준 사람이 있음이 부럽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부러운 것은...... 저리 양팔로 다 안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추억이 있다는 것이 부럽습니다." 
해루의 말에 위창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의 이야기가 남의 일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 역시 외롭고 스산한 풍경을 가슴에 품고 살아왔더랬다.......
고개를 흔든 위창은 허리를 굽혀 해루와 시선을 맞췄다. 
"아비를 만들어줄 재주는 없다. 이미 이리 자라 버렸으니 자라는 것을 지켜보아줄 수도 없고. 허나, 다른 것을 보아줄 수 있다."
해루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 무엇을 보아줄 수 있으신 겁니까?"
"네가 늙어가는 것을 보아주마."......
"그 긴 시간, 널 지켜봐주마. 네가 태어나고 자란 시간 동안의 추억을 함께할 수 없었지만, 앞으로 남은 시간만큼의 추억은 함께해 줄 수 있다. 원한다면 양팔은커녕 온몸을 다 써도 안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추억도 만들어주지."

-최최측근(왕)은 해루가 사라진 곳을 응시했다. 
"저 아이의 근본이며, 부모 형제 없이 세상 홀로 살아온 것이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내가 본 저 아이는 지금까지 만난 그 어떤 여인들보다 투명하고 맑았네. 아마도 내가 본 것을 세자 또한 본 것일 테지. 세자가 저 아이를 바라보고 있네. 멍석을 깔아줘도 거부하던 그 녀석이 말이야. 그것이면 족하지 않겠는가?"
그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것은 한 나라의 왕이 아닌, 그저 내 자식의 안녕과 행복을 염원하는 세상의 모든 아비가 짓는 그런 미소였다.

- "제겐 귀한 것을 살 수 있는 돈도, 지난 날을 되새길 추억도 없사옵니다. 그러나 결코 잃어버릴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를 믿어주는 사람들, 지지해 주는 사람들, 그 사람들의 마음을 이 서책에 담았습니다."
중전은 천천히 서책을 넘겼다....... 서책에는 힘을 주는 말과 지청구가 뒤섞여 있었다. 그러나 하나같이 따뜻한 저의가 숨어있는 말들인지라, 서책을 읽는 중전의 얼굴에 미소가 먹물처럼 번져갔다. 그러다 중전의 시선이 서책의 맨 마지막 장에 멈추었다. 
"이건 누구의 마음이더냐?"
해루는 중전이 손끝으로 짚은 글씨를 넘겨보았다.......
수강궁 솟을대문 앞에서 쓴 향의 마음.
변치 마라[不變]
....... "그것은 제 최측근의 마음이옵니다."

- "나이 들어 좋은 것이 몇 가지 있는데, 제일 좋은 건 주책을 떨어도 그리 큰 흉이 안 된다는 것이야. 젊었을 적에는 이리하면 저 사람이 나를 어찌 볼까, 저리하면 저 사람 눈에 어찌 보일까 전전긍긍하였는데, 나이가 드니 이리해도 나이 들어 저러는구나, 저리해도 나이 들어 노망이 났구나, 이해하고 넘어가 준단 말이지."
"혹시 이해하는 게 아니라 체념하는 것 아닙니까?"
"어쨌든 늙은이는 주책을 떨어도 큰 흠이 안 되더구나." 
"그렇습니까?"
"두 번째로 좋은 건 말이다. 굳이 살피지 않아도 느껴지는 것이 있다는 거야. 예를 들면 지금 같은 경우지. 최측근이 굳이 입 밖으로 소리 내지 않아도 뭔가 근심이 있다는 걸 이 늙은이는 다 알고 있지. 그러니 말해 보아. 무슨 걱정이 있는 것이야?"

- 나무가 튼튼해지려면 대지가 너무 좋아서도 안 된다네. 진실로 천 년을 가는 나무는 오히려 척박한 대지에서 자라는 법이지. 위태로운 절벽 위에서 비바람 견뎌내고, 가뭄과 홍수도 이겨내야 비로소 천 년을 버틸 굳건한 뿌리를 가질 수가 있지. 좋은 대지와 훌륭한 환경에서 자란 나무는 보기엔 예뻐도 뿌리가 얕은 법. 작은 고난에도 허리가 꺾이고 부러지기 쉬운 법이지. 

 

< 3권 : 지킬 것이옵니다 >

- 해루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향이 말을 이었다.
"잃은 줄 알았던 정인을 일 년 만에 다시 만났다. 곁에 두고 한시도 떨어지기 싫은데, 엉뚱한 고집을 피우며 이곳에 처박혀 있으니 어찌하겠느냐? 남들이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이리 자주 걸음 하는 수밖에."
정인이라는 말에 해루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못 본 사이, 많이 뻔뻔해지신 것 같습니다."
"지난 일 년 동안 내가 무얼 하며 지낸 줄 아느냐?"......
"후회만 했느니."......
"왜, 그땐 그리 못했을까. 이럴 줄 알았으면, 이런 일 저런 일 원없이 하는 것이었는데, 잃고 나서 돌이켜보니 후회되는 일이 산처럼 쌓였더구나. 그래서 이젠 다시 후회하지 않기로 하였다."
향의 말속엔 시린 바람이 가득했다. 그 아릿한 슬픔이 해루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차마 표현할 수 없는 격통에 해루는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그 상실감. 그 아픔. 저도 알고 있습니다. 아니, 저하께서는 모르실 것입니다. 저하께서 앓았던 상실감, 그 이상으로 전 그리움을 앓았으니까요.

- 맞네. 연인(戀人). 사모하는 사람이란 뜻이지. 가느다란 실(絲) 사이를 말(言)이 이어주고, 그 말을 마음(心)이 떠받치니, 연모할 연이 되었지. 즉, 연인이란 서로 마음을 의지하고 떠받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라네. 그러니 그 사내의 말과 마음을 한번 믿어보라고 하게. 그 동무에게 전하게나. 정녕 누군가를 연모한다면 상대에게 마음을 의지하고 믿어야 한다고 말이야.

- 조금은 과하게 느껴지는 향의 배려에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그러나 ...... 아주 싫은 건 아니었다. 향의 관심이, 그녀를 향한 그의 마음이 고마웠다.  다만, 이것이 익숙해질까 걱정되었다. 
이제 곧 헤어져야 할 사람. 이리 깊이 정이 들었다가 나중에 그의 곁을 떠나게 되면 마음 아플까 두려웠다. 그분의 마음에 깊은 상처가 생길까 염려되었다.

- 향과 해루가 손을 잡은 채 방을 나갔다. 그때, 두 사람의 등 뒤로 위창의 목소리가 달라붙었다. 
"해루는 나와 일 년을 함께 보냈습니다." 
위창의 한마디에 해루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소리라도 치고 싶었다..... 해루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향을 올려다보았다.
향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위창을 돌아보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와는 일 년을 함께하였지만, 나와는 평생을 함께할 것이다."
...... 위창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 집이다. 집에 왔다.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러니 오늘은...... 그래, 지금 당장은 조금 행복해도 괜찮겠지? 조금, 아주 조금만 행복해야겠다. 
불행이 시샘하여 다가오지 않도록, 하여 나의 불행에 이 사람들이 다치지 않도록....... 조금만 행복해지리라. 
조금만....... 아주 조금만.

- 더는 도망가지 않아. 사나운 운명 따위 거침없이 뛰어넘으리라. 
그것이 날 믿어준 그분에 대한 보답이며, 또한 날 위해 죽어간 덤이를 위한 길일 테니까.
행복해지자, 해루야.
감히 불행이 다가오지 못할 만큼 행복해지자.
필사적으로 그리되도록 노력하자. 해루야.
해루는 마음으로 다짐 또 다짐했다. 그리고 열심히 아침 소세를 했다.

 

< 4권 : 비밀 회합 >

- "궁은 네 생각보다 험한 곳이다. 가시덤불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고, 깎아지르는 절벽이 앞을 가로막을지도 모른다. 마냥 고운 길만 있다 말할 수는 없구나. 그래도 해루야......"
향은 고개를 내려 해루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저 많은 사람들이 네가 나아갈 길을 밝혀주었듯 너는 혼자가 아니라는 걸 기억하거라. 다른 것은 모두 잊어도 상관없다. 그러나 내게 오는 길만은 기억해라. 언제 어느 때라도, 힘들면 내게 오너라. 날 찾거라. 널 위한 길은 언제나 이리 환히 밝혀둘 것이다."
가슴 벅찬 사랑에 해루는 가슴이 뛰었다.

- "섭섭하였겠지. 허나, 왕이란 그렇단다. 남들이 보기엔 높은 권좌에 앉아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사는 것이 왕인 줄로만 알지. 하지만 정작 하고 싶은 한 가지를 못 하는 것이 왕이란다. 옳은 것을 보아도 크게 웃을 수 없고, 그른 것을 보아도 세심히 살펴야 한다. 그것이 왕의 숙명이고 천명인 게지."
자신이 그러했고, 뒤를 이을 왕세자 역시 그러하리라.

 

< 5권 :  네 북극성은 나다 > 

- 향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깍지 끼고 있는 해루의 손에 끼워주었다. 작은 반지에 홍수정으로 만들어진 꽃이 만개하여 있었다. 
"이게 무엇입니까?"
"홍수정의 고운 빛이 마음마저도 곱게 물들인다 하더구나."
향은 반지에 이어 팔찌도 꺼냈다.
"이 자수정은 사나운 귀의 범접을 막아준다 하니, 이것들을 몸에서 떼어놓지 마라."
"저하, 미신은 믿지 않는다 하시지 않았습니까?"
...... 눈으로 직접 보고, 증명되지 않는 것은 절대로 믿지 않는다 하셨던 분이 아니신가.
"그래, 그랬지. 헌데 말이다. 너무나 소중한 것이 생기니 별것이 다 걱정되는구나. 진실로 소중한 것이 내 곁에 있으니, 사소한 우려나 근심도 그냥 지나칠 수 없구나." ......
"여전히 난 미신을 믿지 않는다. 허나, 널 지킬 수만 있다면, 미신일지라도 기대고 싶구나."
부질없고 허튼 짓인줄 알고 있었다. 어리석은 사내의 미욱한 마음이라 하여도 상관없었다. 내 여인을 지키는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라 하여도 상관없었다.

- 좋은 판수가 되는 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 무어냐?
상대방이 원하는 말을 해주는 것입니다... 그래?
판수를 찾는 사람은 대개 구석까지 몰릴 대로 몰린 사람입니다. 이것저것 해도 안 되니 결국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심정으로 미신에 매달리는 것이지요. 그리 절박한 사람에게 너는 틀렸다, 그건 아니다, 이렇게 말하는 건 소용없습니다... 그럼?
무작정 고개부터 끄덕여주는 겁니다. 너의 말이 옳다. 넌 잘못되지 않았다. 또는 왜 이제 왔느냐며 그 사람을 감싸 안아야 합니다... 그리하면? 
안심하게 되지요. 그 다음엔 이러저러한 처방을 내립니다.

- 꽃은 마냥 여린 줄만 알았다.
나비는 한없이 나약한 줄만 알았다.

이제야 알았다.
꽃이 진 자리에 다시 싹이 트는 걸.
바람 속에서도 나비는 날개짓을 멈추지 않는 걸.
아침이 올 때까지 밤새워 네가 나를 기다리는 걸. 이제야 알았다.

이제야 알았다.
나 없는 세상에 너 살 수 없는 줄 알았건만.
너 없이는 내가 없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 자화의 입술 끝이 실룩거렸다. 서찰의 다음 내용이 날 선 눈동자 위에 새겨졌다.
'네가 우리와 다른 꿈을 꾸고 있음을 알았다. 우리가 키운 복수의 꿈속에서 우리의 아이들은 원망만을 먹고 자랐구나. 우린 단지 옛왕조를 일으키고 싶었건만, 우리의 한을 먹고 자란 너희는 정녕 원한만을 키웠구나. 모두 내 잘못이다. 슬픔과 비통함은 온전히 옛사람인 우리가 껴안아야 할 몫인 것을. 너희에게 보여주어선 안 될 아픔인 것을. 기억은 물려주되 원한은 우리가 모두 짊어져야 했던 것을. 모두 나의 잘못이다. 두문의 딸아, 너의 잘못이 아니다. 용서해다오.'

- "나와 나의 아들이 만들 세상을 그대에게 보여주고 싶다. 그것을 다 보고, 다 들은 후에도 그대가 옳았는지 말해다오. 그때까지 그대는 죽을 수 없다. 그대의 죽음, 내가 허락하지 않는다."
왕의 눈은 진심을 말하고 있었다.  그제야 민안선은 깨달았다.
오늘의 죄를 심판하는 건, 지나간 날만을 마냥 그리워하는 허깨비가 아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건 다음 세대의 역할이었다. 옛사람의 한도 분노도 그렇다고 슬픔도 아닌, 역사라는 이름의 준엄한 시선. 
이 시대의 잘못은 다음 세대가 판단하리라.
고려가 망했듯, 이 나라 조선이 무능하고 부패하면, 먼 훗날 우리의 후손이자 우리의 아이들이 이 땅과 나라를 바꾸리라.

- 그러나 먼 여정에 영원한 동반자는 없는 법. 
기쁨도 슬픔도 모두 묻어두어야 한다. 버려두어야 한다. 그래야 지친 걸음일망정 다시 옮길 수 있지 않겠는가.

- 향이 해루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나와 함께하자."
"쉽지 않은 일이 될 겁니다. 어쩌면 운명에 대항하는 일이 될지도 모릅니다. 운명이란 도도하게 흐르는 거대한 물살입니다. 작은 시내의 물길은 옮길 수 있어도 강물의 큰 흐름은 거스를 수는 없는 법입니다."
"상관없다. 우리 아이의 미래를 위한 일이 아니더냐? 가시덤불이 있으면 치워버리면 되는 것이고, 절벽 끝에 다다르면 되돌아가면 되는 것이다. 우리가 함께 노력하면 어떤 일이든 극복할 수 있다. 그러니 함께하자."

.

.

.

 

; 묵직한 한 권 한 권이 모두 5개나 되는 방대한 이야기. 하지만 흥미롭게 술술 잘 읽히는 스토리텔링의 만렙. 전작 [구르미 그린 달빛] 못지 않게 비현실적인 듯 현실적인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저자의 놀라운 상상력으로 또 한번  만들어졌다.

이 책 또한 드라마로 만들어질 것이라는 소문에 서둘러 읽어내려갔다. 드라마로 정형화 되어버린 캐릭터들을 먼저 접하게 되면, 아무리 상상력을 발휘한다 하여도 그 얼굴들이 글속의 주인공들과 일체화 되어버리는 폐해(?) 를 떨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책속의 인물과 장면들을 먼저 상상해보고 그것이 어떻게 드라마화 되었는지 비교해보는 것도 솔솔한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으로 읽어서 그런지, 참으로 드라마로 만들기 딱 좋은 대사들과 상황들이 겹쳐 보이기도 하는 것은 혼자만의 느낌인지...ㅎ

어쨌든... 오랜만에 시공을 떠나 재미있는 여행을 다녀온 듯 휴식과 여유를 주는 책을 만날 수 있어 반가웠다. 

감히 불행이 다가오지 못할 만큼 행복해지고, 그것도 필사적으로 그리 되도록 노력하자는 해루의 말은 아직도 귓가에 남는다.  행복은 마냥 오기만을 기다려서는 안 된다. 행복해지려 노력해야 하고 또 그리 되도록 마음먹어야 생기는 것 같다. 요즘은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발버둥치는 사람에게 바꿀 수 없는 미래란 존재하지 않는 건지 아직 확실히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도전은 해보아야 최소한의 변화가 일어날 것이니... 오늘도 나는 해루처럼  발버둥친다.  

이제는 좀더 즐겁게, 어깨에 힘을 빼고 자연스럽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