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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권 [ 내 안의 차별주의자]

가네샤7 2022. 9. 23. 09:43

56권 [ 내 안의 차별주의자]

라우라 비스뵈크 / 장혜경 옮김. 심플라이프.  2020.

* 책을 읽으며 내 맘에 파장을 일으켰던 말들과 느낌들을 주로 적어본다~~

오스트리아의 사회학자인 저자는 빈 대학에서 사회불평등의 원인과 행태, 결과를 연구하고 있으며, 특히 성적 평등의 사회학, 권력, 언어, 이민 문제에 관심을 갖고 집필 및 연구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이 책은 끊임없이 선을 긋고 우월해지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욕망을 사회학적 이론과 지식, 위트를 동원해 해부한다.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가 옳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내재된 독선과 멸시의 시선을 들여다보고, 나와 다르게 살고 있는 이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재고하게 한다. 책속에서는 소속범주로서의 '우리'가 노동, 성별, 이민, 빈곤, 재산, 범죄, 소비, 관심, 정치의 영역에서 어떤 구조를 띠는지, 또한 그 안에서 '남들'을 바라보는 독선적 시선이 어떻게 표현되는지를 살피며, 그를 통해 타인의 자질과 능력에 대한 폄하가 경계짓기와 소속감, 인정 욕구를 반영한다는 사실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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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아하는 일을 하라'는 외침은 위장되고 은폐된 엘리트주의이다. 항상 열정만 좇으며 살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부모가 대학 등록금과 집세와 용돈을 다 대주는 젊은이라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혼자 아이들을 키워야 하는 한 부모 가정이라면 절대 불가능할 일이다.

- '좋아하는 일을 하라!'는 주문은 동기와 즐거움이 재능보다 더 중요하다는 인상을 풍긴다. 하지만 가수 프랭크 시나트라를 좋아하고 노래방에서 노래를 잘 부른다고 해서 재즈 가수로 성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워킹을 잘하고 유행하는 패션을 줄줄이 꿰고 있다고 해서 세계적인 모델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되려면 조건이 맞아야 하고, 누구나 그 조건을 갖출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은 안된다.

- 또 열정이 없는 사람은 어쩔 것인가? 이 세상에는 그 무엇에도 사랑과 열정을 불태우지 않는 사람들이 있고, 그 숫자도 적지 않다. 그럼 그런 사람들은 그저 돈을 벌기 위해 일하는 자신을 탓하고 미워해야 할까? '흥미로운' 일을 하지 못하고 자기 일에 '활활 타오르지' 못하며 직업을 통해 자아실현을 할 수 없으니 자책해야 하는 걸까? 그런 사람들은 재능도 능력도 없는가?

- 열정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접근 방식이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의 모토는 '좋아하는 일을 하라'가 아니라 '네가 하는 일을 좋아하라!'가 될 것이다. 그럼 훨씬 마음의 부담이 덜할 것이다.

- '워킹맘' 이라는 말부터가 차별의 뉘앙스를 담고 있다. '워킹 대디'나 '워킹 페어런츠'라는 말은 아무도 쓰지 않는다. 성역할 고정관념이 육아를 여성의 몫으로 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령 혼자 아이를 키우는 10대 싱글맘은 무책임하다는 손가락질을 받는다. 책임질 능력도 없으면서 대책없이 아이를 낳았다는 이유로 말이다. 그럼 자식의 양육을 거부한 아빠는 어떻게 되는가?

- 성범죄가 늘어나면 여자들에게 밤에 혼자 돌아다니지 말라고 충고한다. 이 사실만 보아도 논쟁의 초점이 어디에 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위험이 존재할 경우 잠재적인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가 자리를 피해야 한다. 이런 식의 해결방안은 당연하지도 않을뿐더러 교육적인 효과도 없다. 

- 한 사회에서 통용되는 남자다움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문화와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이다. 마음이 여리고 약한 남자는 남자답지 못하다는 요즘의 해석이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중세 유럽의 기사들은 귀족 여성을 향한 사랑의 감정을 마음껏 쏟아냈고 그것이 남자다움의 증거라고 생각했다.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의 고통과 실망을 다 표현하는 것이 사내답지 못하게 징징대는 유약한 행동이 아니라 강인함을 보여주는 방법이라고 말이다. 고통을 겪고도 무너지지 않는다면 그거야말로 강인함과 남자다움의 증거가 아니겠는가.

- 자기 감정에 솔직하지 못한 것은 자연스럽지 않을뿐더러 자신은 물론이고 남들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슬픔과 절망을 억누르다 보면 나중에는 아예 느낄 수도 없게 된다. 그렇게 자신의 아픔을 느끼지 못하면 남의 아픔도 공감할 수가 없다. 

- 상징적 폭력이란 일상에서 일어나며 '건강한 인간 이성'에게는 당연하게 보이는 권력과 지배의 현상을 말한다. 현대사회의 특징은 권력과 지배 상황이 더 이상 물리적 폭력을 통해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상징적 폭력은 조용하고 잠재의식적이기에 당하는 사람이 폭력이라고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폭력이다. 멸시의 연출 방식을 통해 상징적 차원에서 빈곤이 고착되기 때문이다. 

- '사회 기생충'이라는 말이 존재한다는 사실부터가 이미 일자리를 잃어 실업급여를 받는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 실제로 많은 실업자들이 자신은 다른 실업자들과 다르다고 생각한다. 자신은 상황 탓에 일자리를 잃었지만 남들은 자기 잘못으로 그렇게 된 것이라며 자신과 남들을 구분한다. 동일시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사회적 정체성을 지킬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 현대 사회는 '성공'을  '끝까지 이루어내고야 마는 투지'로 해석하며, 이 투지는 권력, 돈, 타이틀, 명성 같은 지표를 통해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공한 사람이 가장 훌륭한 인간이라는 생각은 허구이다. 성과 원칙은 사회적 지위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통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결코 성공을 거둘 수 없다. 만인의 성공 확률이 똑같지가 않기 때문이다. 

- 외모가 출중하고 든든한 경제적 배경이 있으면 창업을 해서 기업을 성공적으로 이끌기가 훨씬 수월하다. 부모에게서 물려 받은 인맥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또 사회적 네트워크도 많이 필요할 텐데 유명 인사들이 즐비한 '상류 사회'를 어려서부터 들락거렸다면 인맥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운도 따라야 한다. 그런데도 창업을 하면 누구에게나 똑같은 기회가 돌아간다는 환상이 널리 퍼져 있다.... 흙수저보다 금수저의 패가 당연히 더 좋다. 

- 소비와 사회적 지위는 다양한 방식으로 밀접하게 연관된다. 소비를 신분 소통의 수단으로 삼아 상징성 있는 제품으로 지위를 과시하고 남들의 눈에 더 높은 계층으로 보이려 애쓰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성공해서 경제적으로 독립한 사람들일수록 과시의 방식이 교묘해서 전통적인 신분 상징을 별로 선호하지 않는다.

- 문제는 순수한 부의 과시로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요즘엔 공정무역 제품과 지속 가능한 소비재 역시 제품과 소비자의 신분을 입증한다. 공정 무역 커피, 유기농 제품, 친환경 여행 상품의 구매자들은 사회적 책임감과 환경 의식을 은근히 과시하여 도덕적 우월감을 느낀다. 

- 청바지와 운동화 차림으로 6성급 호텔에서 체크인을 하는 부자는 그런 소박한 차림새로 '나는 내 신분을 과시할 필요가 없다'는 메시지를 준다. 실리콘밸리 스타트업 기업의 백만장자들은 회색 후드티를 즐겨 입고 다녀서 겉모습만으로는 인턴사원하고 전혀 구분이 안된다.

 - 큰 집을 장만하고 고급 차를 타고 호화판 휴가를 즐기면서 대놓고 돈 자랑을 하는 건 '더 높은' 사회 집단의 인정을 받고 싶은 신흥 졸부들이나 하는 짓이다. 대신 그들은 명사들을 잔뜩 초청해 우아한 파티를 열면서 부자 집단의 소속임을 확인하고 동시에 '남들'과 선을 긋는다. 자신의 출신이지만 이제는 버리고 싶은 그 '남들'과 확실히 경계를 긋고 싶어 한다.

-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해주면 좋을지를 반영하는 제품을 구입한다. 그 이유는 소비가 가장 기본적인 사회적 본능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회적 지위를 두고 경쟁을 벌이며, 신분을 상승시키는 제품은 자아상을 강화한다.... 상품은 남에게 인정받고 존중받고 싶은 기본 욕구를 충족하는데 기여한다. 

- 소비재는 근본적으로 자아의 확장이며, 우리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이고 싶은지, 누구와 친하고 싶은지, 어떤 가치를 공유하는지를 반영한다. 유명인이 사용한 제품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그래서다.

- 목표는 더 높은 집단에 소속되기 위한 불평등 조장 및 강화이다. 특정 소비재에 돈을 투자하지 않으면 가치가 떨어지고 기회가 줄고 심한 경우 중요한 인맥을 잃을 수도 있다. 따라서 소비는 항상 자유로운 결정이 아니다.

- 일을 하는 방식 역시 내성적인 사람들에게는 맞지 않는 기준을 따른다... 학교에서도 팀 원칙이 득세한다. 모둠 활동, 협동 과제, 단체 학습을 통해 직장에서 날로 중요해지는 팀워크 능력을 가르치자는 것이다.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즉석에서 아이디어나 의견을 내지 못하는 조용한 아이들, 능력이 뛰어난데도 집단에서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는 아이들은 불이익을 당한다. 지금의 학교 시스템에서는 이들의 특성이 좋지 않은 평가를 받는다.

- 이런 집단적 사고의 원칙은, 실제로 혁명적인 발명과 그 활용은 회의장보다 독자적인 고민과 골몰에서 탄생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더욱 아이러니하다. 

- 내성적인 사람들의 특성을 경시하고, 그들을 너무 느리다거나 너무 수줍음이 많다거나 너무 자신감이 떨어진다고 인식할 경우 그것 역시 일종의 사회적 불평등을 초래한다. 사람의 특성이 '성공한' 삶으로 이끄는 조건이 되면 그것은 개인의 일상적 기회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그런 특성은 태어날 때 이미 정해진다. 그러나 인종, 출신, 성별처럼 누가 봐도 명백한 특징들과 달리 내향성을 사회적 불평등의 한 범주로 보는 시선은 아직 미미하다.

- 일상의 순간을 자발적으로 기록하고 공개하는 행위는 포스트모던적 감시 구조로 해석될 수 있다... 네트워크만큼 타인의 시선이 중요하고 또 타인의 시선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이 많은 곳도 없다. 사람들은 가상의 스포트라이트를 더 밝히기 위해 돈을 투자하고 생명의 위협까지 무릅쓴다... 디지털 관심이라는 이 새로운 화폐를 얻기 위한 경쟁은 고단하고 힘들다. 정보의 도구, 만남의 플랫폼, 소통과 인정의 수단으로 탄생한 디지털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 실제의 자아를 넘어서고 심지어 이것을 위협할 수 있다. 우리는 침몰하고 낙오되어 아무도 모르는 인간이 될 수 있으며 멸시와 조롱거리가 될 수 있다.

- 요즘엔 세계관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서로 등지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은 우리의 존재를 위협하는 나쁜 인간이라고 인식하는 것 같다... 관용적 태도만이 동의하지 않는 의견을 반박할 여지를 만들 수 있다. 무관용은 상대의 의견에서 존재의 권리를 박탈하려 한다. 상대의 의견을 무찌르거나 금지하려 한다. 아예 들어오지 못하게 문을 잠가서 손쉽게 처리해버리려 하는 것이다. 그 결과 진정한 다양성이 피를 철철 흘린다.

- 진리를 찾는 자의 태도는 다른 이를 향한 호기심과 관용과 이해다. 자신이 옳은지 확신할 수 없다면 다른 의견과 태도를 존중해야 할 것이고, 그것은 다시 건설적 대결과 토론을 가능하게 한다.

- 자유는 치열하게 싸워 얻은 연약한 체계이다. 그 대가는 자기 책임과 쉼 없는 감시이다.

- 정치에 관심 없어요! 그렇게 말하는 것은 특권 행위다. 비정치적일 수도 있는 것도 특권이기 때문이다. 비정치적이어도 괜찮으려면 - 자신의 성별, 재산, 인종, 성적 지향 덕분에 특권적 지위를 누릴 수 있어서- 품위있는 삶과 안정이 보장되어야 한다. 그럴 때는 차별이나 억압 같은 무거운 주제들이 계속해서 현안으로 대두되면 따분하고 피곤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제 그 우는 소리 좀 그만 들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그들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안전을 위해 투쟁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  특권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우월감을 느끼기 위해 불이익을 당하는 다른 집단을 경멸한다는 주장이 많다. 독선과 경시는 '하류층'인 사람들의 전형적인 태도라고 말이다. 그러나 엘리트라고 해서 남을 무시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엘리트층에서 그런 현상이 더 두드러진다. 다만 사회에서 그들의 행동을 문제 삼지 않을 뿐이다. 해석의 권리가 그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 독선의 게임 방식과 표현 형태는 다양하다. 유행이 지난 것도 있고 여전히 잘 먹히는 것도 있으며, 새롭게 등장한 것도 있다. 변치 말아야 할 것은 도덕적인 우월감과 경멸을 조장하는 세력을 잘 살피고 공개해 널리 알리는 일, 그리고 남을 향하는 엄격한 시선을 자주 자신에게로 돌리는 일이다. 이런 패턴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본다면 적어도 이 점에서는 우리 모두가 평등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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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감하는 부분도 있고 음... 하는 부분도 있다. 이해가 잘 되는 부분도 있고 난해한 문장도 있다. 집중해서 읽지 않으면 다시 한 번 더 되짚어야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래도 내 안의 차별은 무엇인지 알아야 할 것 같은 의무감?에 손을 놓지 못했다. 

우리는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차별은 그 다름에 차등 즉,  순위를 매기고 배제하고 혐오하는 것이다. 나와 타인의 생각과 입장, 상황에 선을 긋고 편 나누기를 하며 그들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행동이다.

 '저들'  '그들' 이라 불렀던 사람들이 내가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 또한 없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우선은 다름에 대한 존중, 그리고 대화와 소통, 이해와 배려, 공생, 상생의 길 정도의 상투적인 성찰 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나의 인식과 행동은 과연 떳떳한가.  반성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