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권 [ 보통의 언어들]
60권 [ 보통의 언어들]
김이나. 위즈덤하우스. 2020.
* 책을 읽으며 내 맘에 파장을 일으켰던 말들과 느낌들을 주로 적어본다~~
히트곡만 300여 개가 넘는 작사가 겸 방송인. 따뜻한 시선과 이성적인 태도를 함께 지닌, 그리고 이것을 누구보다 선명하게 표현하는 사람으로 저자는 자신을 소개한다. 보잘것 없고 부끄러운 부분은 누구에게나 있고 오히려 그로 인해 스스로를 더욱 빛낼 수 있다고 생각하며, 오늘도 쳇바퀴 도는 일상 속 특별함을 꿈꾸며 살아가고 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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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사람은 완벽하지 않다'는 말은 완벽히 상대적인 말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 나 하나만 놓고 보자면, 나는 완벽하다. 잘난 부분 딱 그만큼의 못난 부분을 갖춘, 완벽한 밸런스를 갖춘 사람이다. 비틀어진 부분이 있고, 그래서 나오는 독특한 시각과 표현력이 있다. 모나게 튀어나온 못된 심술도 있고, 그 반대편에 튀어나온 만큼 쑥 패여서 무언가를 담아내는 포용력이 있다. 대부분의 장점과 단점은 이렇게 서로 등을 지는 형태라 떼어놓고는 말할 수가 없다. 예민함과 섬세함, 둔함과 털털함처럼.
- 내가 오래오래 지내고 싶은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실망시키는 데 두려움이 없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높은 확률로 당신을 실망시킬 테지만, 우리 평균점을 찾아가보지 않겠냐는 말...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만인에게 사랑받을 수는 없다. 하지만 역으로 말하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인 소수와의 관계는 견고한 것이다. 한 번도 실망시키지 않고서는, 나는 누군가와 진실로 가까울 자신이 없다. 우리, 마음껏 실망하자. 그리고 자유롭게 도란거리자.
- 야무지고 똑 부러지는 모습만 보이게 되는 상대가 있는가 하면 허술하고 실수투성이의 모습만 꺼내게 되는 상대가 있다. 사랑하기에 좋은 사람은, 이 사람과 함께할 때 나의 가장 성숙하고 괜찮은 모습이 나오는 사람이다. 나는 어차피 누구에게도 완벽하거나 객관적으로 설명이 가능한 한 사람으로 존재할 수 없다. 대상과 상황에 따라 미세하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의 부족한 모습을 끊임없이 비춰주는 사람에게 혹여 '이런 사람이 그래도 나를 발전시켜 주겠지'라는 마음에 매여 있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의 고유한 아름다움, 훌륭함이란 건 분명히 있다. 그리고 그런 좋은 모습을 볼수록, 나 역시도 스스로를 그렇게 믿을 수 있게 된다.
- 돈이 아니더라도 거스름돈과 닮은 것들을 꼼꼼히 챙기는 사람이라 함은, 돌아서 빈자리를 한 번 더 보는 사람이다. 구차해짐을 불사하고 생략되어도 무방한 한 마디를 건넬 수 있는, 따스함이 있는 사람이다. 이는 아무도 캐치해주지 않는 나의 미세한 상처에 안부를 물어줄 수 있는 사람이다. 호방한 사람들이 놓친 작은 세계를 들여다봤을 때 그곳이 아름다울 수 있는 건 어쩌면 바로 이런 지질한 사람들 덕이 아닐까.
- 주는 자가 받는 이를 오랫동안 세심히 지켜봐온 시간이 선물 받는 이의 만족도를 좌지우지하듯, 조언도 그렇다. 듣는 이의 성향과 아픈 곳을 헤아려 가장 고운 말이 되어 나올 때야 '조언'이지, 뱉어야 시원한 말은 조언이 아니다. 하물며 몸에 좋다는 쓴 약도 캡슐에 담아 삼키는 마당에, 말에도 그만한 정성은 들여야 할 것이다... 그게 '포장'이 가진 철학이 아닐까.
- 나를 들여다보고 챙긴다는 것은 정신적으로만 해야 하는 일이 아니다. 그렁그렁 맺히는 눈시울도 내 몸이 내가 들어줬으면 하고 중얼대는 혼잣말이고, 펑펑 쏟아져 나오는 오열은 내가 내게 살려달라고 외치는 울부짖음이다.
- 자존감은 근육 같은 거예요. 한 번 높아지면 계속 높아져 있는 게 아니죠. 그냥 높아질 때도 있고 낮아질 때도 있고 그런 것 같아요. 그래서 근육처럼 키워야 해요. 가끔 약해졌을 때는 또 쉬었다가, 다시 운동해서 키우고, 그렇게 반복하는 거죠.
- 나는 세상은 방구석에서 뭐 하나에 꽂히면 거기에 모든 걸 바치는 덕후들과 무리에서 늘 튀어가며 소리쳐준 나대는 이들로 인해 변해왔다고 믿는 사람이다. 온몸에 돌을 맞는 나대는 이가 기존의 틀을 깨어주면, 이전의 세계에서는 이득이 될 게 없었던 무언가에 몰두해온 덕후들이 파놓은 세계가 이를 뒷받침한다. 그 사이 어디 즈음을 부유해왔다면, 적어도 이 양 극단의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빚을 진 셈이다. 그러니 나댄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려 할 때마다 틀어막는 걸로 그 빚을 탕감, 아니 더 늘리지는 않도록 해보자.
- 모두에게, 모든 곳에서 온전한 나로서만 존재한다는 건 아주 이기적이어야 가능하다. 배려하기에, 사랑하기에, 책임이 있기에, 히스토리가 있기에 우리는 종종 다른 모습을 한다.
- 겁이 많은 자들은 지켜야 하는 것들의 가치를 아는 자들이다. 또 자신과 얽힌 사람들에 대한 책임감, 일에 대한 신중함이 있는 자들이다. 수비에 총력을 다하는 축구팀의 경기가 지루할지언정, 그들은 결국 강하다. 삶에 있어 충동보다는 지구력으로 대처하는 이들, 그중에서도 '나는 겁이 많은 편이야' 라고 스스로 말하는 사람들은 더욱 호감이다. '겁이 없음'을 매력적인 무기로 휘두르지 않는 그들은, 결과적으로 늘 강했다.
- 사람은 본인 고유의 색깔을 가져야 한다고, 특별한 나만의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고 늘 말하곤 한다. 그러고는 정작 그런 사람을 만났을 때, 본능적으로 배척한다... 그리고 반짝이는 그 특별한 사람을 성의 없는 한 마디로 정의해버린다. '이상하다!' ... 앞으로 살면서 우리는 아마도, 수없이 많은 '이상하다'는 말을 툭 하고 내뱉게 될 것이다. 그때마다 그 말을 '특별하다'고 대체하는 것만으로도, 좀 더 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음미하며 살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 '살아남는다'는 말은 단순히 존재감 없이 그럭저럭 발을 걸치고 있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살아 남아보며 깨달았다.
- 모든 일에 있어서 유난히 수행능력이 빛나는 때가 있다. 그때가 바로 감이 좋은 때다. 감은 영원하지도 않지만 한 번 왔다 가면 영영 돌아오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다시 한 번 돌아왔을 때 그것을 펼칠 기회가 오느냐 마느냐의 문제일 뿐, 그리고 그건 내가 어떻게 살아왔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
- 내 지난날들엔 비굴하고 비참했던 순간들이 많았다. 모르긴 몰라도 저렇게 까지 해야 하나 하는 시선도 많았을 것이다. 중요한 건, 빛나는 재능만으로는 할 수 없는 게 '살아남기'라는 것이다. 금 밖으로 나가면 게임이 끝나는 동그라미 안에서 변두리에 밀려나 휘청거리게 되는 순간들이 있었고, 아마 앞으로도 몇 번은 더 올 것이다. 그때 볼품없이 두 팔을 휘저어가며 다시 균형을 잡으려고 애쓰는 것, 그 멋없는 순간 스스로 겸연쩍어 선 밖으로 나가떨어진다면 잠깐은 폼날지언정 더이상 플레이어가 될 순 없다. 기억하자. 오래 살아남은 시간 속에 잠깐씩 비참하고 볼품 없는 순간들은 추한 것이 아니란 걸. 아무도 영원히 근사한 채로 버텨낼 수 없단 걸.
- '뇌'라는 것은 결국 몸뚱이의 일부이니 피가 쌩쌩 돌고 산소가 공급되어야 원활히 돌아갈 터이고, 튼튼한 몸이 받쳐주는 지구력으로 버티는 시간이 있어야 '영감'이라는 게 오더라도 잡을 기력이 있는 것이다. 영감뿐이랴. 새로운 걸 시작하고 싶은 의지, 힘든 일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근성, 새로운 기회가 오기까지 잠복하고 버티는 힘... 모두 결국 체력에서 나온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들은, 이미 주어져 있는 게 많다. 다만 그것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다루느냐에 따라 내일의 질이 달아질 뿐이다.
- 자존심과 자존감의 차이는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의 차이만큼이나 크다. 자존심이 꺾이지 않으려 버티는 막대기 같은 거라면, 자존감은 꺾이고 말고부터 자유로운 유연한 무엇이다. 자존심은 지켜지고 말고의 주체가 외부에 있지만 자존감은 철저히 내부에 존재한다. 그래서 다른 누가 아닌 스스로를 기특히 여기는 순간은 자존감 통장에 차곡차곡 쌓인다... 선행이 누군가의 칭찬과 거래되는 순간 자존감 통장에는 쌓일 것이 없다. 나의 대견함을 '알아주는' 주체를 타인에게 넘겨버릇하는 게 위험한 이유다.... 그러니 고요히 자신을 토닥여주는 습관을 가져보자.
- 인디언들의 언어에는 잡초라는 말이 없대요. 그들은 모든 식물과 동물에는 각각의 영혼이 있다고 믿었고 모든 것이 존재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답니다. 그래서 작물과 잡초를 특별히 구분할 필요가 없었던 거죠. 살다보면 유난히 '내가 잡초 같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는 거 같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이 된 기분.... 그럴 때 인디언들의 생각을 떠올려보면 어떨까요? 그들의 기준에서 본다면 세상에 존재 이유 없이 태어난 생명은 없을 테니까요.
- 세상에서 가장 느린 동물로 알려진 나무늘보는 하루에 18시간 동안 나무 위에서 잠을 잡니다. 움직임도 느리고 근육 양이 탁월하게 적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이동하는 일이 없죠. 이렇게 게으른 나무늘보가 야생에서 살아남은 비결은 뭘까요? 비결은 단순합니다. 일주일에 한 번 배변할 때 빼고는 절대로 나무 아래로 내려오지 않는 것. 즉 누구에게도 관심받지 않는 게 나무늘보의 생존 전략인 셈인 거죠. 옆 사람의 속도에 맞춰 빠르게 살지 않아도 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죄책감을 느낄 필요도 없죠. 혼자 고립되면 고립될수록 그것이 생존무기가 되는 나무늘보의 세계... 가끔은 세상에서 가장 느린 나무늘보처럼 느리게, 느리게 살고 싶어집니다.
- 후회는 많은 선택권이 있을수록 더 커집니다. 내가 선택하지 못한 수많은 가능성과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이 뒤섞여 자꾸만 내 머릿속을 어지럽히거든요. 하지만요, 한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은 반드시 한 가지를 결정해야 할 때 본능적으로 최선을 다해 선택한다고 합니다. 돌아보면 후회밖에 없는 그 선택도 '그때는 제일 나은 선택이었다'는 거죠. 혹시 후회로 가득한 밤을 보내고 있다면 잠시 멈춰볼까요? 그땐 그게 최선이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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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아한다, 미움받다, 선을 긋다, 뒷담화, 지질하다, 염치가 있다, 찬란하다, 유난스럽다, 나대다, 이상하다, 쳇바퀴를 굴리다, 기특하다.... 흔히 널려있던 보통의 언어들이 저자의 섬세한 관찰과 감성적인 터치로 나를 숨 쉬게 하는 특별한 언어들로 되살아난다.
일상의 언어들이 가지는 다양한 얼굴들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얻는다. 그러고 보면 처음부터 뭔가 특별한 것은 없는 것 같다. 어느 순간 그 특별함을 발견하면서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새로운 의미를 찾게된다. 깨닫기 전과 깨달은 후에도 세상 자체는 달라진 것이 없다는 선사들의 말씀처럼...
금 밖으로 나가면 게임이 끝나는 동그라미 안에 있으며, 선 밖으로 나가떨어지면 더이상 플레이어가 될 수 없다는 말이 뼈아프게 다가온다. 잠깐 비참하고 볼품 없는 순간들을 잘 이겨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우리들의 치열한 삶.
나는 지금 잠시 선 밖에 나와 있다. 자존감도 근육처럼 단련해야 하듯이, 잠시 동안의 휴식으로 전략을 정비하고 다시 뛸 수 있는 에너지를 충전하며 자존감을 어루만져주고 있다. 상처에 딱지가 생기고 더이상 염증이 생기지 않을 때쯤 새로운 플레이어로 동그라미 안으로 들어가 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