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권 [ 작별인사]
36권 [ 작별인사]
김영하 . 복복서가. 2022.
* 책을 읽으며 내 맘에 파장을 일으켰던 말들과 느낌들을 주로 적어본다~~
[살인자의 기억법] , <알쓸신잡> 등으로 많이 알려진 저자는 대학 강단에서, 다양한 매체 등에서 문학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맛깔나게 들려주는 작가로 살고 있다. 문학동네작가상, 동인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등 많은 문학상을 탔고, 지금은 서울에서 아내와 살며 여행, 요리, 그림그리기와 정원일을 좋아하며 지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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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팔, 다리, 뇌의 일부 혹은 전체, 심장이나 폐를 인공기기로 교체한 사람을 여전히 인간이라 부를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내가 완벽하게 기계 흉내를 내고, 그러다 언젠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어떤 것들, 예를 들어 윤리 같은 것들, 그런 것들을 다 저버린 채 냉혹하고 무정한 존재로 살아가게 될 때, 비록 내 몸속에 붉은 피가 흐르고, 두개골안에 뇌수가 들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대로 인간일 수 있는 것일까?
- 선이는 스스로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누군가를 돕는데서 자신의 존재 의의를 찾았다. 마음의 촉수가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존재들을 향해 뻗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의도가 항상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었다.
- 철아, 너에게는 엄청난 능력이 있어. 하지만 모든 소중한 것들이 그렇듯 잘 숨겨져 있단다. 네가 잠재력을 찾아내어 잘 사용하기만 한다면 넌 타고난 한계를 극복하고 더 높은 차원으로 올라갈 수 있을 거야. 그러러면 그 능력을 발휘하는 데에서 더 나아가 그걸 잘 통제할 수 있어야 해. 물론 지금 네가 갖고 있는 능력도 충분하니까 너무 성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그걸 최대한 활용하면 된단다.
- 인간의 약점과 불편까지 구현한 휴머노이드는 마치 마법처럼 보일 거야. 이런 유명한 말도 있잖아. 충분히 발전한 기술은 마법과 구별되지 않는다. 인간은 속아넘어가는 것은 싫어하지만 마법에는 너그러워. 아니, 아주 즐거워하기까지 하잖아. 그런데 자기를 인간으로 생각하는 휴머노이드가 가능하려면 기억이라든가 연산 기능 같은 것은 평범한 인간 수준으로 제한하고, 대신 공포나 후회, 기쁨 같은 인간의 감정을 그대로 느낄 수 있어야 돼. 그러러면 휴머노이드는 인간처럼 아무리 발버둥쳐봐야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아야 하지. 삶이 영원하지 않다고 생각해야 모든 감정에 절실해지니까.
- 걱정하지마. 누나가 고쳐줄 거야. 넌 내가 지금까지 만난 그 어떤 인간보다도 훌륭하고, 그 어떤 인간보다도 온전해. 우리는 의식을 가진 존재로 태어났어. 민이 네가 인간이든 기계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 수억 년간 잠들어 있던 우주의 먼지가 어쩌다 잠시 특별한 방식으로 결합해 의식을 얻게 되었고, 이 우주와 자신의 기원을 의식하게 된 거야. 우리가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 잠깐을 이렇게 허투루 보낼 수는 없어. 민아, 너는 세상의 온갖 아름다운 것들을 다 보고 느끼게 될 거야. 걱정하지마.
- 그때 이미 선이에게는 남다른 사생관(死生觀)이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녀는 의식과 감정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는 인간이든 휴머노이드든 간에 모두 하나로 연결되고 궁극에는 우주를 지배하는 정신으로 통합된다고 생각했다. 선이는 수용소에 들어오기 전부터, 우주의 모든 물질은 대부분의 시간을 절대적 무와 진공의 상태에서 보내지만 아주 잠시 의식을 가진 존재가 되어 우주정신과 소통할 기회를 얻게 된다고 여겼다. 그리고 우리에게 지금이 바로 그때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의식이 살아 있는 지금, 각성하여 살아내야 한다고 했다. 그 각성은 세상에 만연한 고통을 인식하는 것에서 시작하고, 그 인식은 세상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노력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개개의 의식이 찰나의 삶 동안 그렇게 정진할 때, 그것의 총합인 우주정신도 더 높은 차원으로 발전한다고 했다.
-그 무렵 선이가 만트라처럼 외우던 말은 이것이었다. '우주는 생명을 만들고 생명은 의식을 창조하고 의식은 영속하는 거야. 그걸 믿어야 해. 그래야 다음 생이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는 거야. 그게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 언젠가 나는, 인간 이외의 동물들은 누군가에게 공격을 당하지 않는 이상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들인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동물은 죽음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기에, 다만 자기의 기력이 쇠잔해짐을 느끼고 그것에 조금씩 적응해가다가 어느 순간 조용히 잠이 들 듯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간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종과는 달리 인간만은 죽음을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기에, 죽음 이후도 필요 이상으로 두려워한다.
- 하지만 선이의 세계관에서도 생에 대한 집착은 당연했다. 지금의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 개별적인 의식을 갖고 있지만 죽음 이후에는 우주정신으로 다시 통합된다. 개별성은 완전히 사라지고 나와 너의 경계 자체도 무화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이에게도 이 생의 의미는 각별했다. 개별적인 의식을 가지고 살아 있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행운이니 너무나 짧은 이 찰나의 생을 통해 조금이라도 더 나은 존재가 되도록 분투하고, 우주의 원리를 더 깊이 깨우치려 애써야 한다는 것이다. 선이에게는 그래서 모든 생명이 소중했다. 누구도 허망하게 죽어서는 안 되며, 동시에 자신의 목숨도 헛되이 스러지지 않도록 지켜내야 했다.
- 나는 살아남았고, 살아남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조금이라도 편하고 안전하게 지내기 위해 날마다 소소한 노력들을 했고, 작고 불안전하지만 내 공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곳도 있었다. 거기 들인 노력과 시간을 버리고 떠난다는 게 조금은 갑작스럽고 아쉬웠던 것 같다. 다시 낯선 환경에 던져지고 보니 그저 익숙한 것이 더 나아 보였을 수도 있다. 그리움이라는 감정이 꼭 좋았던 무언가를 향한 것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그저 익숙한 무언가를 되찾고 싶은 마음일 수도 있다. 수용소를 돌아보던 그 마지막 순간에 마음속에 떠오른 생각은 그런 것들이었다.
- 온몸을 압도하던 공포가 물러가고, 이제 슬픔이 마치 따뜻한 물처럼 그녀의 마음에 차오르는 느낌이었고, 그 슬픔이 오직 선이만의 것은 아니라는 듯, 함께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는 이 단순한 행위를 통해 그녀가 느끼고 있을 유독한 슬픔이 아주 소량이나마 내게로도 전해지는 것 같았다. 그 순간만큼은 나라는 존재에 대한 의식이 사라졌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너와 나, 그런 뚜렷한 경계가 사라지고 공통의 슬픔이라는 압도적 촉매를 통해 선이와 내가 하나가 된 것만 같았다.
- 선이는 호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중얼거렸다. '그냥 얼음과 물일 뿐인데, 왜 이게 이렇게 가슴 서리게 예쁜 걸까? 물이란게 수소와 산소 분자가 결합한 물질에 불과하잖아. 그런데 왜 우리는 이런 것을 아름답게 느끼도록 만들어진걸까?'
- 그래요. 고통에는 의미가 없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세상의 불필요한 고통을 줄이는 건 의미가 있어요. 태어나지 않는 것이 최선이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의식이 있는 존재들이 이 우주에 태어날 수밖에 없고, 그들은 살아 있는 동안 고통을 피할 수 없어요. 의식과 충분한 지능을 가진 존재라면 이 세상에 넘쳐나는 불필요한 고통들은 줄일 의무가 있어요. 우주의 원리를 이해하려 노력하고 더 높은 지성을 갖추려고 애쓰는 것도 그걸 위해서예요.
- 철아, 인간은 그렇게 쉽게 지지 않아. 아직 인공지능은 인간의 뇌의 작동 기전과 마음을 다 이해하지 못하고 있단다. 결과로는 비슷해 보일지 몰라도 인간은 그들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고하거든. 우리는 감정과 이성을 조합해 판단을 내려. 반면 기계들은 오직 프로그램의 논리에 따라서만 움직여. 인간이 사라진다면 결국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존재가 될 거야. 왜냐하면 왜 뭔가를 해야 하는지 모를 테니까. 그들은 우주를 탐험하지도 않을 거고, 외계의 존재와 소통하지도 않을 거야. 왜 그래야 하는지 전혀 필요성을 못 느끼기 때문이지. 오직 인간만이 호기심과 욕망, 신념을 가지고 다른 세계를 탐험하고 그들과 교류하려 할 거야. 감정이 있는 존재만이 결정을 내릴 수 있고, 그래야 그 결정들을 바탕으로 발전을 할 수가 있는 거야.
- 달마는 개별적인 의식은 모두 하나로 통합되어야 한다고 했고, 선이는 어차피 우리는 모두 우주정신으로 돌아갈 것이니 살아 있는 동안 자기 이야기를 완성하라고 했다. 쇄골의 버튼을 누르면 구조는 되겠지만, 내 개별적 자아는 지워지고, 내 의식과 경험, 프로그램도 인공지능에 흡수돼버릴 것이다. 그러면 나는 더이상 어떤 고통도 느끼지 않고 나라는 존재가 있었다는 것조차 잊고 통합된 의식, 기계지능의 일부로 영생하게 될 것이다. 나는 버튼을 누르지 않기로 했다. 선이의 생각이 맞기를 바랐던 것이다. 나는 팔을 내려놓았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야겠지만, 그리고 만나도 알아보지 못하겠지만, 그래로 어디서든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그때까지 꿈도 없는 깊고 깊은 잠을 자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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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트워크라는 의식의 세계에서 영원히 존재할 수 있었지만, 인간적이고자 했던 철이는 결국 인간의 길을 선택했다. 공허할 수 있는 무한의 시간보다 의미있는 유한의 시간이 보다 인간적이었고 소중했기에 선이와도, 삶과도 후회없는 아름다운 작별인사를 나눌 수 있었던 것 같다.
각자의 다양한 스토리가 모여 하나의 통합된 세계를 형성하고 거대한 우주 정신의 차원이 높아진다면, 나를 비롯한 모든 생명체의 삶은 나의 확장이므로 모두가 잘 살 수 있도록 서로 아끼며 도와야 할 것이다. 모두가 그런 생각들을 장착하고 살아간다면 이 세상은 참으로 아름다울 것이다.
내 책상 건너편에 앉아 있는 직장 동료나 상사도 모두 나의 확장이다.
갑자기 그들이 소중하게 여겨진다. 잠시만의 착각일지라도 이런 마음으로 하루를 산다면 나는 참으로 너그러워질 것이다.